고대 그리스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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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그리스 종교는 다신교를 기반으로 하며, 제우스 등 여러 신들과 여신들을 숭배했다. 신들은 불멸의 존재였지만 운명에 복종해야 했고, 인간과 유사한 면모를 보이며 인간과 교류하기도 했다. 그리스 신화는 세계의 시작과 영웅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트로이 전쟁과 같은 주요 사건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종교적 실천으로는 제단에서의 제사, 신탁, 축제 등이 있었으며, 신비 종교를 통해 개인적인 영적 경험을 추구하기도 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오만을 경계하고 중용의 미덕을 강조했으며, 사후 세계에 대한 다양한 믿음을 가졌다. 고대 그리스 종교는 로마 제국 시대를 거치며 쇠퇴했지만, 르네상스 이후 부활하여 현대에도 재건주의 운동이 존재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모두 똑같은 종교적 믿음을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공통적인 믿음은 있었다.
고대 그리스 종교는 방대한 그리스 신화를 가지고 있었다. 신화는 주로 신들에 대한 이야기와 그들이 인간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었다.
2. 신학
고대 그리스의 신학은 여러 남신과 여신을 믿는 다신교였다. 신들의 왕인 제우스를 중심으로 신들의 위계질서가 있었는데, 제우스는 강력했지만 전능하지는 않았다. 제우스는 하늘과 천둥번개를, 포세이돈은 바다와 지진을, 하데스는 죽음과 지하 세계를, 헬리오스는 태양을 다스리는 등 각 신들은 자연의 특정 부분을 다스렸다. 아프로디테가 사랑을 다스린 것처럼 추상적인 개념을 다스리는 신도 있었다.
고대 그리스의 신들은 불멸이었지만 전능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운명에 복종해야 했다. 예를 들어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 후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는 것은 운명이었고, 신들은 그의 여정을 더 힘들게 할 수는 있었지만 막을 수는 없었다.
고대 그리스의 신들은 인간처럼 행동했고 인간의 덕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인간과 교류했고, 심지어 인간과 결혼하여 자식을 낳기도 했다. 때로는 신들끼리 서로 대립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일리아스》에서는 트로이 전쟁 때 아프로디테, 아레스, 아폴론은 트로이를 지원했고, 헤라, 아테나, 포세이돈은 그리스를 지원했다.
어떤 신들은 특정 도시와 관련되어 있었다. 아테나는 아테네, 아폴론은 델포이와 델로스 섬, 제우스는 올림피아, 아프로디테는 코린토스와 관련되었다. 포세이돈은 에티오피아와 트로이, 아레스는 트라키아와 관련되는 등 그리스 밖의 국가들과 관련된 신들도 있었다.
스파르타에서 숭배하는 사냥의 처녀 여신 아르테미스와 에페소스에서 숭배하는 많은 젖가슴을 가진 생식과 풍요의 여신 아르테미스는 서로 매우 달랐다. 이처럼 숭배하는 신의 이름이 같더라도 그 성격이나 숭배 방식은 지역에 따라 다를 수 있었다.
2. 1. 신들의 위계
고대 그리스의 신학은 다신교에 기반을 두고 있었으며, 많은 남신과 여신들이 존재했다. 이 신들 사이에는 위계 질서가 존재했는데, 신들의 왕인 제우스가 다른 신들을 지배했지만 전능하지는 않았다.[56]
어떤 신들은 자연의 특정 측면을 지배했다. 예를 들어, 제우스는 하늘의 신으로 천둥과 번개를 다스렸고, 포세이돈은 바다와 지진을, 하데스는 죽음과 지하 세계를 다스렸으며, 헬리오스는 태양을 지배했다. 아프로디테는 사랑을 지배하는 등 추상적인 개념을 다스리는 신들도 있었다.[5]
고대 그리스의 신들은 불멸이었지만, 전능한 존재는 아니었다. 그들은 운명에 복종해야 했으며, 신들의 힘이나 의지보다 운명이 우선했다.[6] 예를 들어,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전쟁 후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는 것이 운명이었고, 신들은 그의 여정을 연장하고 더 어렵게 만들 수는 있었지만, 그를 막을 수는 없었다.
신들은 인간처럼 행동하고 인간의 악덕을 지니고 있었으며, 인간과 교류하고 자식을 낳기도 했다.[7] 때로는 신들끼리 대립하여 서로를 이기려고 했다. 일리아스에서는 아프로디테, 아레스, 아폴론이 트로이를 지원했고, 헤라, 아테나, 포세이돈은 그리스를 지원했다. (신마키아 참조).
어떤 신들은 특정 도시와 관련되어 있었다. 아테나는 아테네와, 아폴론은 델포이와 델로스와, 제우스는 올림피아와, 아프로디테는 코린토스와 관련되었다. 포세이돈은 에티오피아와 트로이와, 아레스는 트라키아와 관련되는 등 그리스 밖의 국가들과 관련된 신들도 있었다.
같은 이름을 가진 신이라도 숭배 방식이 다른 경우가 있었다. 스파르타에서 숭배되는 사냥의 처녀 여신 아르테미스와 에페소스에서 숭배되는 다산의 여신 아르테미스는 매우 달랐다.[71]
2. 2. 신들의 인간적인 면모
고대 그리스의 신들은 불멸의 존재였지만, 전능한 존재는 아니었다. 그들은 인간처럼 행동하고 인간의 덕성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인간과 교류하고 심지어 인간과 결혼하여 자식을 낳기도 했다. 때로는 신들끼리 서로 대립하여 상대를 이기려고 애쓰기도 했다. 예를 들어, 《일리아스》에서는 트로이 전쟁 때 제우스, 아프로디테, 아레스, 아폴론은 트로이를 지원했고, 헤라, 아테나, 포세이돈은 그리스를 지원했다.[7] (신들의 전쟁을 뜻하는 테오마키(Theomachy) 문서를 참조).
신들은 인간적인 악덕을 가지고 있었고, 많은 신들이 전형적인 인간보다 도덕성이 떨어지는 행동을 하기도 했다.[7] 그들은 인간과 교류했고, 때로는 그들과 반신이라고 불리는 아이를 낳기도 했다.
신들은 그리스 신화에서 모이라](Moirai)]로 알려진
2. 3. 신들과 운명
고대 그리스의 신학은 다신교에 기반했다. 즉, 많은 남신과 여신들이 있다는 가정하에 신학이 전개되었다. 제우스를 신들의 왕으로 하는 신들의 위계질서(계급 체계)가 있었는데, 제우스는 비록 전능한 존재는 아니었지만 다른 모든 신들과 존재들을 지배하는 수준의 권능을 지녔다. 어떤 신들은 자연의 특정 측면에 대해 지배권을 가졌다. 예를 들어, 제우스는 하늘의 신으로 천둥과 번개를 내릴 수 있었다. 포세이돈은 바다와 지진을 다스리는 권능을 가졌다. 하데스는 죽음의 영역과 지하 세계 전역에서 권능을 행사하였다. 그리고 헬리오스는 태양을 지배했다. 또 다른 신들은 추상적인 개념을 지배했는데, 예를 들어 아프로디테는 사랑의 지배자였다.[5]
고대 그리스의 신들은 불멸한 존재이기는 했으나 전능한 존재는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 운명에 복종해야 했다. 즉, 신들은 운명의 권능에 지배당하는 존재들이었다. 예를 들어, 트로이 전쟁 후에 고향 이타카로 되돌아가는 것은 오디세우스의 운명이었다. 그가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그의 운명이었기 때문에, 신들은 그의 여행 시간이 더 길어지게 하거나 여정이 더 힘들어지게 할 수는 있었어도 그가 자신의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것 자체를 막지는 못하였다.[6]
신들은 인간적인 악덕을 가지고 있었고, 많은 신들이 전형적인 인간보다 도덕성이 떨어지는 행동을 했다.[7] 그들은 인간과 교류했고, 때로는 그들과 반신이라고 불리는 아이를 낳기도 했다. 때로는 특정 신들이 다른 신들에게 반대했고, 서로를 능가하려 했다. 일리아스에서, 아프로디테, 아레스, 아폴론은 트로이 전쟁에서 트로이 측을 지원하는 반면, 헤라, 아테나, 포세이돈은 그리스 측을 지원한다(신마키아 참조).
어떤 신들은 특정 도시와 특별히 연관되었다. 아테나는 아테네와, 아폴론은 델포이와 델로스와, 제우스는 올림피아와, 아프로디테는 코린토스와 연관되었다. 그러나 다른 신들도 이 도시들에서 숭배되었다. 다른 신들은 그리스 외부의 국가와 연관되었는데, 포세이돈은 에티오피아와 트로이와, 아레스는 트라키아와 연관되었다.
이름이 같다고 해서 비슷한 종교 의례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인들은 스파르타에서 숭배되는 사냥의 여신 아르테미스가 에페소스에서 다유방의 다산 여신인 아르테미스와 매우 다른 신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71] 주요 신들에 대한 숭배는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갔고, 대부분의 대도시에는 여러 주요 신들을 위한 신전이 있었지만, 다른 신들을 다른 장소와 동일시하는 것은 끝까지 강하게 유지되었다.
2. 4. 지역 신앙과 신들의 동일시
고대 그리스인들은 여러 남신과 여신을 믿는 다신교를 기반으로 신앙 생활을 했다. 신들 사이에는 위계 질서가 있었는데, 제우스가 신들의 왕으로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었지만 전능한 존재는 아니었다. 제우스는 하늘과 천둥번개를, 포세이돈은 바다와 지진을, 하데스는 죽음과 지하 세계를, 헬리오스는 태양을 다스리는 등 각 신들은 자연의 특정 영역을 지배했다. 아프로디테가 사랑을 관장한 것처럼 추상적인 개념을 다스리는 신들도 있었다.
그리스 신들은 불멸의 존재였지만, 전능하지는 않았고 운명에 복종해야 했다. 예를 들어, 트로이 전쟁 이후 오디세우스가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는 것은 운명이었기에, 신들은 그의 귀환을 늦출 수는 있어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스 신들은 인간처럼 행동하고 인간과 교류했으며, 때로는 인간과 결혼하여 자식을 낳기도 했다. 일리아스에 묘사된 트로이 전쟁에서처럼 신들 사이에 갈등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아프로디테, 아레스, 아폴론은 트로이 편을, 헤라, 아테나, 포세이돈은 그리스 편을 들었다.
특정 도시와 연관된 신들도 있었다. 아테나는 아테네, 아폴론은 델포이와 델로스 섬, 제우스는 올림피아, 아프로디테는 코린토스와 특별히 관련되었다. 포세이돈이 에티오피아와 트로이, 아레스가 트라키아와 관련되었듯이, 그리스 밖의 국가들과 관련된 신들도 있었다.
스파르타에서 숭배된 사냥의 처녀 여신 아르테미스와 에페소스에서 숭배된 다산의 여신 아르테미스는 매우 달랐다. 이처럼 숭배하는 신의 이름이 같더라도 그 성격이나 숭배 방식은 지역에 따라 다를 수 있었다. 주요 신들에 대한 숭배가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었지만, 지역마다 다른 신들을 동일시하는 현상은 고대 그리스 종교가 끝날 때까지 강하게 유지되었다.
3. 신화
신화는 종종 헤라클레스와 그의 12업, 오디세우스와 그의 고향으로의 귀환, 이아손과 황금양모 찾기, 테세우스와 미노타우로스 척살 등 영웅들과 그들의 행위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트로이 전쟁은 그리스 신화의 주요 배경 중 하나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는 트로이 전쟁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아가멤논의 귀향 당일 살해, 오디세우스의 귀향 모험 등 많은 이야기가 트로이 전쟁의 여파를 다루고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거대한 신화 체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연극, 시, 역사, 기행문, 신전 등의 건축물 장식, 도기에 그려진 그림 등 다양한 형태로 현대에 전해졌다.[61] 신화는 역사적 사실과 허구가 섞인 이야기로,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다.[61]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화는 현실의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62] 예를 들어,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군이 아테네를 공격했을 때, 신화를 근거로 데케레이아 지역에는 침공하지 않았다.[62]
3. 1. 신화의 내용과 주제
고대 그리스 종교는 방대한 신화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스 신화는 주로 신들에 대한 이야기와 신들이 지상의 인간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었다. 신화는 종종 헤라클레스와 그의 12가지 과업, 오디세우스의 귀향, 이아손과 황금양모 찾기, 테세우스와 미노타우로스 처럼 영웅과 그들의 행위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61]
그리스 신화에는 여러 종족이 등장한다. 가장 자주 등장하는 것은 신과 인간이지만, 올림포스 12신 이전의 종족인 티탄도 자주 등장한다. 이들 외에도 반인반마 켄타우로스, 자연의 정령 님프(드리아데스, 네레이스), 반인반염소 사티로스 등이 있다. 키클롭스, 스킬라, 카리브디스, 고르고, 미노타우로스와 같은 괴물도 등장한다.[61]
트로이 전쟁은 그리스 신화의 주요 배경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는 트로이 전쟁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아가멤논의 귀향 당일 살해, 오디세우스의 귀향 모험 등 많은 이야기가 트로이 전쟁의 여파를 다루고 있다.[61]
그리스 신화에는 특정한 우주론, 즉 창조 신화가 없다. 여러 종파는 서로 다른 창조 신화를 믿었다.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는 그중 하나로, 태초에 카오스라는 원초신이 있었고, 가이아, 타르타로스, 에로스 등 다른 태초신들을 낳았으며, 이들이 다시 티탄을 낳고, 티탄이 최초의 올림포스의 신들을 낳았다고 설명한다.[63] [64] [65]
그리스 신화는 로마 신화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리스인과 로마인은 문자를 사용했기에 많은 신화가 서사시[66]와 희곡[67] 형태로 기록되었다. 《일리아스》, 《오디세이아》, 《아르고나우티카(Argonautica)》, 에우리피데스의 《바카이(The Bacchae)》, 아리스토파네스의 《개구리(The Frogs)》 등이 대표적이다. 그리스 신화는 르네상스 이후 기독교 유럽 사회에서 인기를 얻으며 보티첼리, 미켈란젤로, 루벤스 등 예술가 작품의 토대가 되었다.
3. 2. 신화 속 등장인물
고대 그리스 종교에는 방대한 신화가 있었다. 그리스 신화는 주로 신들과 영웅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들이 지상의 인간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는 헤라클레스와 그의 12업, 오디세우스의 귀환 여정, 이아손과 황금양모 찾기, 테세우스와 미노타우로스 척살 등이 있다.
그리스 신화에는 신, 인간, 티탄족, 켄타우로스, 님프(드리아데스, 네레이스), 사티로스 등 다양한 종족들이 등장한다. 티탄족은 올림포스 12신 이전의 종족으로, 올림포스 신들은 이들을 미워했다. 또한 키클롭스, 스킬라, 카리브디스, 고르고, 미노타우로스와 같은 몬스터들도 등장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거대한 신화 체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연극, 시, 역사, 기행문, 건축물 장식, 도기 그림 등 다양한 형태로 현대에 전해졌다.[61] 신화는 역사적 사실과 허구가 섞인 이야기로,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다.[61]
헤라클레스의 열두 과업, 오디세우스의 귀향, 이아손과 황금 양털, 테세우스의 미노타우로스 퇴치 등은 영웅들의 대표적인 전승이다. 이들은 신의 혈통을 이은 초자연적인 존재일 수도, 오디세우스나 메넬라오스처럼 인간 부모에게서 태어난 영웅일 수도 있었다.[72] 호메로스는 힘, 용기, 지혜로 존경받는 자를, 헤시오도스는 신화 시대 4대째 자손과 트로이 전쟁, 테바이 전쟁 참가 세대의 자들을 영웅으로 칭했다.[72]
고대 그리스인들은 영웅을 조상 중 가장 유명한 존재로 여겨 존경했다.[72] 영웅은 이상화된 인간으로, 생전의 성질을 유지하며 인간과 신의 중재자가 될 수 있었다.[72] 헤라클레스는 육체적 힘의 화신이자 인간의 보호자로 존경받았으며, "해악을 막는 헤라클레스"(헤라클레스 알렉시카코스), "무사들의 우두머리인 헤라클레스"(헤라클레스 무사게테스) 등으로 숭배되었다.[73]
고대 그리스의 "영웅"은 기독교의 "성인"과는 달리, 인간의 기도를 받고 응답하는, 신과 동격의 존재로 신앙되었다.[74]
그리스 신화에는 인간과 신 외에도 티탄, 켄타우로스, 님프, 사티로스 등 다양한 종족이 등장하며, 키클롭스, 스킬라, 미노타우로스와 같은 괴물도 전해진다.
3. 3. 창조 신화
그리스에는 정해진 우주 생성 신화 또는 창조 신화가 없었다. 여러 종교 단체들은 세상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창조되었다고 믿었다. 그리스 창조 신화 중 하나는 헤시오도스의 ''신통기''에 실려 있다. ''신통기''에 따르면, 처음에는 카오스라고 불리는 원초의 신만 존재했고, 이후 가이아, 타르타로스, 에로스와 같은 다른 원초의 신들이 생겨났다.[63] 이 원초의 신들은 티탄을 낳았고,[64] 티탄은 올림포스 신들의 중심이 되는 제우스와 그의 형제 자매를 낳았다.[65]
3. 4. 신화의 전승과 영향
고대 그리스 종교는 방대한 그리스 신화를 포함하고 있었다. 그리스 신화는 주로 신들과 그들이 지상의 인간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었다. 신화들은 종종 헤라클레스와 그의 12업, 오디세우스와 그의 고향으로의 귀환, 이아손과 황금양모 찾기, 테세우스와 미노타우로스 척살 등 영웅들과 그들의 행위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61]
그리스 신화에는 신, 인간, 티탄족 외에도 반인반마의 켄타우로스, 자연의 정령인 님프 (나무의 님프는 드리아데스, 바다의 님프는 네레이스), 반인반염소의 사티로스 등 다양한 종족들이 등장한다. 또한, 키클롭스, 스킬라, 카리브디스, 고르고, 미노타우로스와 같은 괴물들도 등장한다.[61]
그리스 신화에는 특정한 하나의 우주론, 즉 창조 신화가 존재하지 않았다. 여러 종교 집단들은 서로 다른 믿음을 가졌는데,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는 그중 하나였다. 《신들의 계보》에 따르면 태초에는 카오스만이 존재했고, 이후 가이아, 타르타로스, 에로스 등 태초신들이 태어났으며, 이들이 다시 티탄족을 낳았고, 티탄족이 최초의 올림포스의 신들을 낳았다.[63][64][65]
그리스 신화의 대다수는 로마 신화에 흡수되었으며, 서사시와 희곡 등의 형태로 기록되었다. 대표적인 예로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오디세이아》, 《아르고나우티카(Argonautica)》와 에우리피데스의 《바카이(The Bacchae)》, 아리스토파네스의 《개구리(The Frogs)》 등이 있다.[66][67]
그리스 신화는 르네상스 이후 기독교 유럽 사회에서 대중적인 인기가 있었는데, 보티첼리, 미켈란젤로, 루벤스와 같은 미술가들의 작품의 토대가 되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영웅을 조상처럼 숭배했으며, 영웅은 인간과 신의 중재자 역할을 했다. 예를 들어 헤라클레스는 "헤라클레스 알렉시카코스"("해악을 막는 헤라클레스") 또는 "헤라클레스 무사게테스"("무사들의 우두머리인 헤라클레스")로 숭배되었다.[73] 고대 그리스에서 숭배된 "영웅"은 기독교의 "성인"과는 달리, 인간의 기도를 받고 응답하는, 신과 동격의 존재로 신앙되었다.[74]
4. 사후 세계
그리스인들은 죽은 자의 영혼이 사후 세계 또는 지하 세계(명계, 황천, 하계)로 간다고 믿었다. 장례를 치르지 않으면 영혼이 사후 세계로 가지 못하고 유령이 되어 영원히 세상을 떠돌게 된다고 믿었다. 고대 그리스 종교에서 사후 세계에 대한 관념은 시대에 따라 변화했다.
사후 세계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곳은 하데스였다. 하데스는 제우스의 형제인 하데스 신이 지배하는 영역으로, 원래 "하데스의 장소"라고 불렸으나 후에 그냥 "하데스"라고 불리게 되었다.
《오디세이아》 제11권에서 오디세우스가 하데스를 방문했을 때, 아킬레우스는 오디세우스에게 하데스의 왕이 되느니 차라리 지상의 농부의 종이 되겠다고 말하였다.
4. 1. 지하 세계의 구성
그리스인들은 죽은 자의 영혼이 사후 세계 또는 지하 세계(명계, 황천, 하계)로 간다고 믿었다. 장례를 치르지 않으면 영혼은 사후 세계로 가지 못하고 유령이 되어 영원히 세상을 떠돌게 된다고 믿었다. 고대 그리스 종교에서 사후 세계에 대한 관념은 시대에 따라 변화했다.
사후 세계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곳은 하데스였다. 하데스는 제우스의 형제인 하데스 신이 지배하는 영역으로, 원래 "하데스의 장소"라고 불렸으나 후에 그냥 "하데스"라고 불리게 되었다.[75] 타르타로스는 영원히 정죄받은 자들이 가는 고통과 참회의 장소, 즉 지옥에 해당한다.[76] 엘리시움은 즐겁고 기쁜 곳, 즉 천국에 해당하며, 덕이 있는 자나 신비 가르침 또는 신비 종교의 비전가들이 사후에 거주하는 곳이다.[77]
초기 미케네 시대에는 죽은 자는 모두 하데스로 간다고 믿었는데, 이는 초기 유대교에서 죽은 자는 모두 쉐올로 간다고 믿었던 것과 같다. 그리스 고졸기에 신비 가르침 또는 신비 종교가 흥기하면서 타르타로스와 엘리시움 같은 장소와 관련 교의가 나타났다.
아킬레우스, 알크메네, 암피아라오스, 가니메데, 이노, 멜리케르테스, 메넬라오스, 펠레우스 등 소수의 인물과 트로이 전쟁, 테베 전쟁에서 싸웠던 많은 사람들은 육체를 가진 채로 불멸화되어 엘리시움, 축복받은 자의 섬, 하늘, 바다, 혹은 땅 바로 아래에서 영원히 산다고 믿었다. 이러한 믿음은 호메로스, 헤시오도스 등 오래된 문헌에 나타나며, 기독교가 보급된 후에도 강하게 남았다. 많은 사람에게 죽음은 절망이지만, 영혼만은 계속 살아간다고 믿었다.[78]
피타고라스, 플라톤 등 일부 그리스인들은 윤회 사상을 믿었으나, 모든 그리스인이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에피쿠로스는 영혼이 죽으면 해체되어 사라지는 단순한 원자일 뿐이므로, 죽음 후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쳤다.
4. 2.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의 변화
그리스인들은 죽은 자의 영혼이 사후 세계 (지하 세계, 명계, 황천, 하계)로 간다고 믿었다. 장례를 치르지 않으면 영혼이 사후 세계로 가지 못하고 유령이 되어 세상을 떠돌게 된다고 믿었다. 고대 그리스 종교에서 사후 세계에 대한 관념은 시대에 따라 변화했다.사후 세계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곳은 하데스였다. 하데스는 제우스의 형제인 하데스 신이 지배하는 영역으로, 원래 "하데스의 장소"라고 불렸으나 후에 그냥 "하데스"라고 불리게 되었다. 타르타로스는 영원한 형벌을 받은 자들이 가는 지옥과 같은 곳이었고, 엘리시움은 천국과 같이 덕이 있는 자나 신비 가르침 (신비 종교)의 비전가들이 가는 곳이었다.
초기 미케네 시대에는 죽은 자는 모두 하데스로 간다고 믿었는데, 이는 초기 유대교에서 죽은 자는 모두 쉐올로 간다고 믿었던 것과 같다. 그리스 고졸기에 신비 가르침 (신비 종교)이 흥기하면서 타르타로스와 엘리시움에 대한 믿음이 나타났다.
아킬레우스, 알크메네, 암피아라오스, 가니메데, 이노, 멜리케르테스, 메넬라오스, 펠레우스 등과 트로이 전쟁, 테베 전쟁에서 싸웠던 많은 이들은 육체를 가진 채 불멸하여 엘리시움, 축복받은 자의 섬, 하늘, 바다, 혹은 땅 밑에서 영원히 산다고 믿었다. 이러한 믿음은 그리스 고졸기(기원전 800~500)에 하층 계급이 사회와 정치에서 더 큰 역할을 하면서 발전했다. 신비 가르침 (신비 종교) 덕분에 이러한 사후 세계관을 가질 수 있었다.[104]
피타고라스와 플라톤 등 일부는 윤회 사상을 믿었으나, 모두가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에피쿠로스는 영혼이 죽으면 사라지는 원자일 뿐이므로 사후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가르쳤다.
4. 3. 영웅들의 불멸
고대 그리스인들은 아킬레우스, 알크메네, 암피아라오스, 가니메데, 이노, 멜리케르테스, 메넬라오스, 펠레우스와 트로이 전쟁 및 테베 전쟁에서 싸웠던 많은 이들이 육체를 가진 상태로 불멸화되었다고 믿었다. 이들은 엘리시움, 축복받은 자의 섬 (Islands of the Blessed) , 하늘, 바다, 혹은 땅 바로 아래의 장소에서 영원히 살고 있다고 여겨졌다.[104] 이러한 믿음은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와 같은 가장 오래된 그리스 문헌에서 발견되며, 기독교 시대까지도 강하게 남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죽음은 육체가 없는 영혼으로서의 지속적인 존재 외에는 아무런 희망이 없었다.[9]피타고라스와 플라톤 같은 일부 그리스인들은 윤회 사상을 받아들였지만, 이는 소수만이 받아들였다. 에피쿠로스는 영혼이 죽음과 함께 소멸되는 단순한 원자라고 가르쳤으며, 죽으면 존재가 소멸된다고 보았다.
5. 종교적 실천
고대 그리스인들은 확고한 경전이나 교리 없이 제사나 의례 등의 "행위" 자체를 중요시했다.[95] 예를 들어, 고전기 아테네에서는 주요 제례가 열린 날만 세어보아도 연간 120일에 달했을 정도로 종교 제례가 중요했다.[95]
근동 및 지중해 세계 전역에서 봉납(奉納)은 신들과 교류하는 수단 중 하나였으며, 크게 두 가지 주요 형식이 있었다.[96] 하나는 "아파르카이"라고 불리는, 음식물, 특히 첫 수확물을 바치는 형식이었고,[96] 다른 하나는 동물의 희생이었다.[97] 가장 단순한 봉헌물은 과일이나 곡물로 만든 과자를 제단에 바치거나, 와인, 우유, 올리브유 등을 땅에 붓는 헌주(獻酒)였다.[98] 음식 봉헌물은 제단에 남겨져 동물의 먹이가 되었으며,[98] 헌주 시에는 땅에 신들의 모습을 액체로 그리기도 했다.[98]
신전은 헌정된 신의 집이었으며, 어떤 의미에서 신은 안에 있는 주요 방인 켈라에 있는 신상에 거주했는데, 일반적으로 유일한 문을 마주보고 있었다. 신상은 보통 실물 크기 정도의 신의 조각상 형태였지만, 어떤 경우에는 실물 크기의 몇 배나 되기도 했다. 초기에는 나무, 대리석 또는 테라코타로 만들어졌으며, 몸의 보이는 부분은 상아 조각, 옷은 금으로 덮어 나무 틀을 씌운 크리세일레판틴 조각 형태가 특히 명망 있었다. 가장 유명한 그리스 신상은 이 유형으로, 올림피아의 제우스상, 피디아스의 파르테논에 있는 아테나 파르테노스가 있는데, 둘 다 거대한 조각상이며 현재는 완전히 사라졌다. 델포이에서 두 개의 크리세일레판틴 조각상의 파편이 발굴되었다. 청동 신상은 적어도 헬레니즘 시대까지는 드물었다.[24]
원래 신전의 신상이었던 로마 대리석 복제품으로 잘 알려진 많은 그리스 조각상 중에는 아폴로 바르베리니와 같이 신뢰할 수 있게 식별 가능한 경우가 있다. 실제로 몇 개의 원본이 남아 있는데, 예를 들어 청동 피레우스 아테나(2.35m 높이, 헬멧 포함)가 있다.
과거에는 그리스 신전의 ''켈라''에 대한 접근이 사제에게만 제한되어 있었고, 다른 방문객들은 드물게 들어갈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노예를 포함한 그리스인들은 ''켈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합리적인 기대를 가졌다. ''켈라'' 안에 들어가면 신상에게 또는 신상 앞에서 기도할 수 있었고, 때로는 만질 수도 있었다. 키케로는 숭배자들의 손길에 의해 발이 상당히 닳아 없어진 헤라클레스의 청동상을 보았다.[26] 올림피아의 제우스상과 같은 유명한 신상은 중요한 방문객 유치 시설 역할을 했다.[27]
5. 1. 제단과 제물
고대 그리스의 종교 의식은 주로 제단에서 거행되었다. 제단은 하나 또는 두세 명의 신에게 바쳐진 경우가 많았으며, 제단에는 그 특정한 신의 동상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음식, 술, 귀중품과 같은 봉헌물은 제단의 왼쪽에 놓였다. 때로는 동물을 제물로 바치는 동물 희생 의식(Animal sacrifice)이 제단에서 행해졌는데, 제물로 바쳐진 동물의 살코기 대부분은 의식의 참가자들이 먹었으며 동물의 내장은 불로 태워 봉헌물로 신에게 바쳤다.[98] 신에게 바치는 제주(祭酒)인 신주(神酒) 또는 헌주(獻酒)는 주로 포도주로 만들어졌는데, 성소뿐만 아니라 심포지움(Symposium)과 같은 일상 생활에서도 신들에게 바치곤 했다.[98]

도시나 마을에서는 어려운 때를 당하면, 노예나 동물을 그 어려운 때를 벗어나는 것의 상징으로서의 희생양으로 내쫓는 파르마코스(Pharmakos)라는 의식이 있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 의식에서 노예나 동물을 상징적인 희생양으로 내쫓음으로써 자신들이 겪는 어려움도 그 희생양과 함께 떠나가기를 희망했다.[98]
고대 그리스에서의 종교적 숭배는 보통 찬가와 기도를 낭송하면서 가축을 제물로 바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런 다음 제물로 바친 가축의 일부는 불태워져 신들에게 번제로 바쳐졌으며 나머지는 숭배자들이 먹었다.[99] 이러한 의식이 행해졌다는 것에 대한 증거는 몇몇 고대 그리스 문헌에서 명확히 발견되는데, 특히 호메로스의 서사시들에서 발견 할 수 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도처에서, 위험에 처한 때나 중요한 사업을 앞두고 있을 때 열린 육고기가 제공되는 연회에서 신의 호의를 얻기 위하여 동물 희생 의식이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100] 예를 들어,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기원전 725년경)에서 유마이오스는 자신의 주인 오디세우스를 위해 기도를 하면서 돼지를 제물로 바치고 있다. 그리스 고전기 수세기 전의 세계를 묘사하고 있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 통치자들의 모든 연회는 희생 의식과 기도로 시작한다. 이와 같은 시대의 문헌들에서 묘사된 이들 희생 의식들에는 기원전 8세기에 행해졌던 희생 의식들의 공통 요소들이 담겨 있다. 또한 시의 도처에서 신이 특정한 표징이나 전쟁에서의 승리를 통해 자신이 지금 현현해 있음을 알릴 때마다 특별한 연회가 열리고 있다. 트로이로 출발하기 전에도 이러한 유형의 동물 희생 의식이 바쳐지고 있다. 오디세우스는 제우스에게 거세하지 않은 숫양을 희생 제물로 헛되이 바치고 있다.[100]
호메로스의 서사시들에 나오는 희생 의식들은 신들을 외적 존재들이 아닌 당시 사회의 구성원으로 보는 관점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대 그리스에서 희생 의식들은 인간과 신 사이의 관계를 형성함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101]
5. 2. 신탁
고대 그리스인들은 공동체나 개인이 신들의 도움이나 조언을 필요로 할 때, 혹은 공동체가 위기에 처했을 때 신탁을 구하러 갔다.[82] 델포이에 있는 아폴론의 성역은 가장 유명한 신탁 신전이지만, 도도나에 있는 제우스의 신탁은 신탁이 그들에게 일상적인 행위였음을 증명해준다.[83] 도도나에서는 신탁을 구하는 사람들이 납판에 질문을 적는 관습이 있었는데, 이 납판이 수천 장 발굴되었다.[84] 내용은 아이를 가질 수 있는지, 이사를 가야 하는지 등 일상적인 내용부터 절도, 살인 범인을 묻는 것 등 다방면에 걸쳐 있었다.[85]신전에서의 신탁 외에도, 새 점 등 다른 방법으로 신들과 의사소통을 하기도 했다.[86] 예를 들어,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에서는 테이레시아스가 점을 쳐 신들의 분노를 읽어냈고[87], 에우리피데스의 『히폴리토스』에서는 무죄로 죄를 의심받는 히폴리토스가 아버지 테세우스에게 자신의 무죄를 점으로 확인해 달라고 호소한다.[88] 또한 꿈은 신들의 경고나 신탁의 일종으로 여겨졌고, 꿈을 적절하게 해석하기 위한 꿈 점 전문직도 있었다.[86]
보이오티아처럼 몇몇 신탁소를 가진 지역도 있었지만, 아테네 등은 지역 내에 신탁소가 하나도 없었다.[90] 신탁을 구하기 위해 델포이나 도도나까지 여행하는 것은 개인에게는 불편하기도 하고 경제적인 부담이기도 했기 때문에, 아테네 사람들은 "만티스"라고 불리는 지역의 예언자를 찾아갔다.[91] 이 만티스들은 희생 제물의 내장이나 새의 비행을 보고 점을 쳤다.[91][92] 아테네의 장군 니키아스는 자신의 광산 경영에 대한 조언을 얻기 위해 개인적으로 예언자를 고용했다.[93]
5. 3. 축제
고대 그리스에서는 다양한 종교 축제들이 열렸다. 이들 중 대다수는 특정 신이나 도시 국가에 한정된 축제였다. 예를 들어, 리카에아 축제는 그리스 아르카디아에서 열렸으며 목신(牧神) 판을 기리는 축제였다. 다른 지역들에서는 매년마다 열리는 경기가 있었는데, 이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고대의 올림픽 경기이다. 고대 그리스의 올림픽 경기는 4년마다 열렸으며 제우스를 기리는 경기였다.[79]
고대 그리스에서는 다양한 축제가 거행되었다. 그 대부분은 특정 신이나 도시를 위해 행해졌다. 예를 들어, 아르카디아에서 열린 Lykaia영어 제전은 목신 판을 위해 열렸다. 또한, 경기 제전이 매년 다른 땅에서 열렸는데, 그중 하나인 올림피아 제전은 4년에 한 번 열리는 제우스에게 바치는 축제였다. 이 외에도 네메아 제전(2년에 한 번, 제우스),[80] 이스토미아 제전(2년에 한 번, 포세이돈), 피티아 제전(4년에 한 번, 아폴론)[81]을 합쳐 4대 경기 제전으로 여겨졌다. 아테네에서 열린 도시의 디오니시아 제전처럼 비극이나 희극이 상연되는 축제도 있었다.
5. 4. 통과 의례
고대 그리스에는 아기가 태어난 후 5일 또는 7일째 되는 날에 하는 암피드로미아라는 통과 의례가 있었다. 고대 아테네인들은 출산을 매우 소중히 여겼는데, 특히 남자아이의 경우 그러하였다.[12]5. 5. 비밀 종교 (밀의)
공공의 컬트 종교에 만족하지 못한 사람들은 여러 신비 가르침(Mysteries) 또는 신비 종교(Mystery religion)에 가입하였다. 이들 신비 가르침 또는 신비 종교는 가르침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비전 전수 의식을 받아야 하는 컬트 종교였다.[32]신비 가르침에서 고대 그리스인들은 전통적인 종교가 주지 못하는, 경험에 입각한 종교적 지식과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달리 말해, 고대 그리스인들은 신비 가르침을 통해 신비적 깨우침을 가지거나 체계적인 종교적 교의를 배웠으며 사후 세계에 대한 가르침을 얻고 영적 교섭의 방법을 배우고 영적인 길의 동료들을 얻었다.[32]
신비 가르침들 중 엘레우시스 신비 가르침과 사모트라키 신비 가르침과 같은 것들은 시간적으로 그 시작이 아주 오랜 것이었으며 또한 공간적으로는 지역적인 것이었다. 반면 디오니소스 신비 가르침과 같은 것들은 여러 지역으로 퍼졌다.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제국 시대 동안, 외래의 신비 가르침 또는 신비 종교들이 그리스 지역 뿐만 아니라 마케도니아 제국와 로마 제국 전역으로 널리 퍼졌다. 이들 중 미트라 신비 가르침과 같은 것들은 당시에 새로이 만들어진 신비 종교였고, 오시리스 신비 가르침과 같은 것들은 그 이전의 수백년전부터 이어져온 신비 종교였다.[32]
6. 도덕
고대 그리스인들은 오만(또는 자만)(hubris|휘브리스영어)을 가장 경계해야 할 덕목 중 하나로 여겼다.[105][106][10] 오만은 단순한 자만심을 넘어, 강간이나 시체 훼손 등 다양한 행위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였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오만이 자연, 신, 도덕의 법칙을 거스를 수 있다고 믿었으며, 고대 아테네에서는 범죄로 다스려졌다.
자부심이나 자존감(pride|프라이드영어)과 허영심(vanity|배너티영어) 자체는 죄가 아니었지만, 극단으로 치닫거나 타인에게 해를 끼칠 경우 오만이 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음식 섭취 등 일상생활 전반에 적용되었으며, 그리스인들은 무엇이든 지나치지 않고 중용을 지키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6. 1. 오만과 절제
그리스인들이 가장 경계한 것 중 하나는 오만 또는 자만(hubris|휘브리스영어)이었다. 고대 그리스인에게 오만 또는 자만을 경계하라는 도덕적 강령은 남보다 자신이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개인적인 자만심뿐만 아니라 강간, 시체의 훼손 등도 포함했다.[105][106][10] 고대 그리스인에게 오만 또는 자만은 자연, 신, 도덕의 법칙을 거스를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었다. 오만 또는 자만은 고대 아테네에서 범죄로 취급되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부심 또는 자존감(pride|프라이드영어)과 자랑하는 마음(vanity|배너티영어 · 허영심)은 그 자체로는 죄가 아니지만, 중용의 태도를 중시하여 극단으로 치닫거나 다른 이에게 상처를 줄 때는 오만 또는 자만이 된다고 여겼다. 이러한 사고는 음식과 음주에도 적용되어, 무엇이든 과도한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예를 들어, 고대 그리스인들은 신체(육체)와 마음(지성)의 능력 둘 다를 동등히 중요하게 생각하여, 경기에서 이 둘을 모두 포함하기도 했다.6. 2. 육체와 정신의 조화
그리스인들이 가장 경계한 것 중 하나는 오만 또는 자만(hubris|휘브리스영어)이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오만 또는 자만은 자연, 신, 도덕의 법칙을 거스를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었다. 오만 또는 자만은 고대 아테네에서 범죄로 취급되었다.[105][106]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부심 또는 자존감(pride|프라이드영어)과 자랑하는 마음(vanity|배너티영어)은 그 자체로는 죄가 되지 않지만, 중용의 태도를 가질 것을 중시했다. 자부심과 자랑하는 마음은 극단으로 치닫거나 다른 이들에게 상처가 될 때 오만 또는 자만이 된다고 여겼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신체의 능력(육체)과 마음의 능력(지성) 둘 다를 동등하게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그들의 경기들 중 많은 것들이 이 둘 다를 포함하고 있었다. 어떤 일에든 지나친 행동은 좋지 않게 여겨졌다.7. 역사
고대 그리스 종교는 청동기 시대 미케네 문명의 종교에서 발전했다. 미케네인들은 포세이돈을 주신으로 숭배했으며, 선문자 B 기록에서 포세이돈과 다른 올림포스 신들의 이름이 확인되지만, 아폴론과 아프로디테는 나타나지 않는다. 미케네 판테온의 절반 정도만이 그리스 암흑기를 거쳐 살아남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 종교는 미노스 문명의 종교와 고대 이집트 종교 등 주변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35][1]
아르카익 시대와 고전 시대 그리스에는 도시 국가(폴리스)가 발전하면서 신전이 건설되었고, 종교는 시민 생활과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종교적 작업은 그리스 조각 발전을 이끌었으며, 여러 신성한 장소는 범그리스적인 지위를 얻어 그리스 민족주의 성장에 기여했다.[38] 그리스 철학이 발전하면서 올림포스 신들에 대한 비판도 나타났다. 크세노파네스는 신들의 인간적인 악덕을 비판했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신교에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그리스 종교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지에 확장되었고, 새로운 왕조들은 종교적 숭배에 자신들을 포함시키려 했다. 이시스와 같은 외래 신에 대한 숭배와 헬레니즘 철학이 중요해졌지만, 전통적인 신앙은 계속되었다. 세라피스는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가 퍼뜨린 헬레니즘적 창조물이었다. 오르페우스교와 피타고라스 학파는 동물 희생에 의문을 제기했고, 헬레니즘 점성술도 발전했다.[39]
기원전 146년 로마 공화정이 그리스를 정복하면서 그리스 종교는 로마 종교와 통합되었다. 그리스 신들은 로마 신들과 동일시되었다.
그리스 신 | 로마 신 |
---|---|
제우스 | 유피테르 |
헤라 | 유노 |
포세이돈 | 넵투누스 |
아프로디테 | 베누스 |
아레스 | 마르스 |
아르테미스 | 디아나 |
아테나 | 미네르바 |
헤르메스 | 메르쿠리우스 |
헤파이스토스 | 불카누스 |
헤스티아 | 베스타 |
데메테르 | 케레스 |
하데스 | 플루토 |
티케 | 포르투나 |
판 | 파우누스 |
로마는 황제 숭배를 위한 사원을 제외하고는 그리스에 새로운 사원을 짓는 데 소극적이었다. 그리스 너머로 정복이 이루어지면서 외래 숭배가 그리스에서도 인기를 얻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고대 그리스 문화가 부흥하면서 고대 그리스 종교도 다시 부흥했다. 현대에는 고대 그리스 종교 재건주의(헬레니스모스) 운동이 존재한다. 위카와 같은 신이교주의 종교 운동도 고대 그리스 종교 요소를 활용한다. 현대 그리스인의 대다수는 그리스 정교회 신자이지만, 일부는 고대 그리스 종교를 믿는 것으로 추정된다.[109][103]
그리스-로마 다신교의 쇠퇴는 로마 제국의 융합적 성격 때문이었다.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 요소가 통합되었고, 기독교와 미트라교 같은 신비 종교도 인기를 얻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했다. 도시 이교도들은 시민 중심지와 사원 단지를 계속 사용했지만, 기독교인들은 교외에 새로운 예배 장소를 세웠다.[40]
율리아누스 황제는 헬레니즘을 재구성하려 했으나 실패했다.[41][42][43] 테오도시우스 1세는 이교를 박해하고, 사원을 파괴했으며, 이교 신 숭배를 금지했다.[46][47][42] 마지막 올림픽 경기는 393년에 열렸고, 그라티아누스 황제는 이교 사제단의 재산을 몰수하고 베스타 여신관을 해산시켰다.[13][48]
로마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로마 신 숭배는 일부 지역에서 초기 중세 시대까지 지속되었다. 몬테카시노의 아폴로 신전은 529년까지 남아 있었고, 마니오트인들은 9세기까지 그리스 신앙을 유지했다.[49][40]
7. 1. 기원


고대 그리스 종교의 주류는 Proto-Indo-European religion영어에서 발전하여 청동기 시대의 초기 미케네 문명의 종교로부터 전개되었다. 고고학 사료에 따르면, 미케네인들은 포세이돈을 주신으로 숭배했다고 여겨진다.[34] 고대 그리스 종교는 미노스 문명의 종교와 고대 이집트 종교처럼 인근 지역에 있던 문화들의 종교적 믿음과 실천을 흡수했던 것으로 보인다.[35] 헤로도토스는 고대 그리스의 많은 종교적 실천들의 연원이 이집트에 있다고 말하였다.[1]
주류 그리스 종교는 원시 인도유럽 종교에서 발전한 것으로 보이며, 초기 시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미케네인들은 지진의 신이자 바다의 신인 포세이돈을 그들의 주요 신으로 여겼을 것이며, 그의 이름 형태와 다른 올림포스 신들의 이름이 선문자 B 기록에서 확인되는 반면, 아폴론과 아프로디테는 나타나지 않는다. 미케네 판테온의 약 절반 정도만이 그리스 암흑기를 거쳐 살아남은 것으로 보인다. 종교의 연속성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는 그리스 본토보다 크레타와 키프로스에서 훨씬 더 명확하다.[34]
그리스 종교 개념은 또한 미노아 종교와 같은 이전의 인접 문화의 신념과 관습을 흡수했을 수 있으며,[35] 키프로스[34]와 페니키아를 통해 근동으로부터 다른 영향이 있었다.[1] 기원전 5세기에 글을 쓴 헤로도토스는 많은 그리스 종교 관습이 고대 이집트에서 유래했다고 추적했다.
대 여신 가설은 석기 시대의 종교가 여성 대 여신에 의해 지배되었고 남성 지배적인 인도유럽 계층으로 대체되었다는 가설인데, 미노아 크레타와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그리스에서도 제기되었지만, 수십 년 동안 전문가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으며,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에는 증거가 부족한 상태로 남아있다. 최소한 미노아 예술의 증거는 신들보다 여신이 더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36] 12 올림포스 신은 제우스가 하늘의 아버지인 만큼, 분명히 강한 인도유럽적 풍미를 가지고 있다.[37]
7. 2. 고졸기와 고전기
아르카익 시대와 고전 시대 그리스에는 번성하는 도시가 발전했고, 그리스 전역에서 디자인이 상당히 일관된 신전이 돌로 지어졌다. 종교는 시민 생활과 밀접하게 연결되었으며, 사제는 대부분 지역 엘리트 출신이었다. 종교적 작업은 그리스 조각 발전을 이끌었지만, 현재는 사라진 그리스 회화는 그렇지 않았다. 많은 종교 관습은 개인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폴리스'' 내에서 연대를 발전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지만, 여러 중요한 신성한 장소가 "범헬레니즘"적인 지위를 갖게 되어 그리스 전역에서 방문객을 끌어들였다. 이는 그리스 민족주의의 성장과 자의식의 필수적인 요소 역할을 했다.[38]
그리스 주류 종교는 그리스 내에서 도전을 받았다. 그리스 철학이 윤리에 대한 아이디어를 발전시키면서 올림포스 신들은 부족한 점이 발견되었다. 몇몇 저명한 철학자들은 신에 대한 믿음을 비판했다. 이들 중 가장 먼저 나온 사람은 크세노파네스로, 그는 신들의 인간적인 악덕과 의인화된 묘사를 꾸짖었다. 플라톤은 그가 "선의 이데아"라고 부른 하나의 최고의 신이 있으며, 그는 이것이 우주의 완전성에서 발현된 것이라고 믿었다.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 또한 다신교적 신의 존재에 동의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에 대한 충분한 경험적 증거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창조를 시작했지만 우주와 연결되거나 관심이 없는 부동의 원동자를 믿었다.
7. 3. 헬레니즘 시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기원전 323년에 사망한 후 로마의 그리스 정복(기원전 146년)까지의 헬레니즘 시대 동안, 그리스 종교는 알렉산드로스의 정복지 일부 지역으로 확장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발전했다. 계승자의 새로운 왕조, 왕과 참주들은 종종 신전에 많은 돈을 썼고, 종교적 숭배에 자신들을 끼워 넣으려고 노력하면서 알렉산드로스를 따랐다. 이는 전통적인 고대 이집트 종교가 오랫동안 군주를 신격화했던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게 훨씬 쉬운 일이었다. 거대한 페르가몬 제단(현재 베를린에 있음)과 시칠리아의 히에론의 제단은 이 시대의 전례 없는 규모의 건축물의 예시이다.
이시스와 같은 이집트에서 수입된 신, 시리아의 아타르가티스, 아나톨리아의 키벨레에 대한 새로운 숭배뿐만 아니라 플라톤주의, 스토아주의, 에피쿠로스주의와 같은 헬레니즘 철학의 여러 철학적 운동이 점점 더 중요해졌다. 이들은 전통적인 종교에서 벗어나는 경향이 있었지만, 많은 그리스인들은 이러한 집단 중 하나 이상의 신념을 가질 수 있었다. 세라피스는 그리스와 지역 신의 스타일을 혼합하여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가 정치적 이유로 이집트에서 고안하지는 않았지만 퍼뜨린 헬레니즘적 창조물이었다. 오르페우스교와 피타고라스 학파를 포함한 다양한 철학적 운동은 동물 희생의 윤리성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고, 신들이 실제로 그것을 감사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남아있는 텍스트에서 엠페도클레스와 테오프라스토스(둘 다 채식주의자)는 주목할 만한 비판가였다.[39] 헬레니즘 점성술은 전통적인 관행에서 벗어나려는 또 다른 시도로 이 시대 후반에 발전했다. 전통적인 신화, 축제, 신념이 모두 계속되었지만, 이러한 경향은 전통적인 판테온, 특히 교육받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의 상상력에 대한 영향력을 줄였을 것이다.
7. 4. 로마 제국 시대
기원전 146년 로마 공화정이 그리스를 정복하면서, 로마는 그리스 종교의 많은 부분을 가져와 자신의 종교와 통합했다. 고대 그리스의 신들은 고대 로마의 신들과 동일시되었다. 예를 들어,그리스 신 | 로마 신 |
---|---|
제우스 | 유피테르 |
헤라 | 유노 |
포세이돈 | 넵투누스 |
아프로디테 | 베누스 |
아레스 | 마르스 |
아르테미스 | 디아나 |
아테나 | 미네르바 |
헤르메스 | 메르쿠리우스 |
헤파이스토스 | 불카누스 |
헤스티아 | 베스타 |
데메테르 | 케레스 |
하데스 | 플루토 |
티케 | 포르투나 |
판 | 파우누스 |
아폴로와 바쿠스와 같은 몇몇 신들은 이들보다 더 일찍이 로마인들에게 수용되었다. 또한 야누스와 퀴리누스처럼 그리스 신과 연관되지 않은, 로마 고유의 신들도 있었다.
로마인들은 일반적으로 모든 중요한 도시에 세워진 황제 숭배를 위한 사원을 제외하고는 그리스에 새로운 사원을 짓는 데 많은 돈을 쓰지 않았다. 예외는 안토니누스 피우스(재위 138–161 CE)로, 그의 위임에는 제국 시대의 가장 인상적인 유물인 바알베크 바쿠스 신전이 포함된다(하지만 그 옆의 유피테르-바알 신전은 더 컸다). 로마 총독과 황제는 종종 신성한 장소에서 유명한 조각상을 약탈했으며, 때로는 그 자리에 동시대의 복제품을 남겨두기도 했다. 기원전 73년부터 70년까지 시칠리아의 총독이었던 베레스는 예외적으로 그의 출발 이후 기소된 초기 사례였다.
그리스 너머로 로마가 거대한 정복을 한 후, 이집트와 아시아에서 온 새로운 숭배가 서부 제국뿐만 아니라 그리스에서도 인기를 얻었다.
7. 5. 쇠퇴와 부흥
르네상스 시대에 고대 그리스의 예술, 인문학, 영성이 부흥하면서 고대 그리스 종교 또한 다시 부흥했다. 현대에도 고대 그리스 종교 재건주의(Hellenic Reconstructionism) 또는 "헬레니스모스"라는 고대 그리스 종교 부흥 운동이 존재한다. "헬레니스모스"는 로마의 마지막 비기독교 황제인 배교자 율리아누스가 처음 사용한 단어로, 현대의 고대 그리스 종교 재건주의를 지칭하는 다른 용어로 사용된다.위카와 같은 여러 신이교주의 종교 운동은 고대 그리스 종교의 요소들을 종교적 실천에 활용한다. 이 중 고대 그리스 종교 재건주의는 남아 있는 자료를 바탕으로 고대 그리스 종교를 최대한 되살려 실천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고대 그리스 종교 재건주의는 포르피리오스, 리마니오스, 프로클로스, 율리아누스로 대표되는 신플라톤주의/플라톤주의 사상과 그리스 고전기 컬트 종교의 종교적 실천을 따르고자 한다.[109]

현대 그리스의 절대 다수는 그리스 정교회 신자들이다. 2006년 미국 국무부 추정치에 따르면, 그리스 전체 인구 1,100만 명 중 약 2,000명 정도가 고대 그리스 종교를 믿는 것으로 나타났다.[109] 그러나 헬레니즘 지도자들은 10만 명의 신자가 있다고 주장한다.[103]
그리스-로마 다신교의 초기 쇠퇴는 로마 제국이 확장되면서 다양한 외래 종교 전통을 동화시키는 융합적 성격 때문이었다. 그리스-로마 철학 학파는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 요소를 통합했으며, 기독교와 미트라교 같은 신비 종교도 인기를 얻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기독교로 개종한 최초의 로마 황제였으며, 서기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제국 내 기독교에 대한 공식적인 관용을 시행했다. 그럼에도 그리스와 다른 지역에서는 이교도와 기독교 공동체가 분리되어 상호 문화적 영향이 거의 없었다는 증거가 있다. 도시 이교도들은 시민 중심지와 사원 단지를 계속 사용했고, 기독교인들은 교외에 새로운 예배 장소를 세웠다. 새로 개종한 기독교인들은 개조된 사원에서 예배를 계속 드린 것이 아니라, 오래된 이교도 공동체가 쇠퇴하고 해산되면서 새로운 기독교 공동체가 형성되었다.[40]
콘스탄티누스의 조카인 로마 황제 율리아누스는 제국 내 기독교의 부상을 막고 "헬레니즘"이라 칭한 그리스-로마 다신교의 융합적 버전을 재구성하려 했다. "배교자"로 알려진 율리아누스는 기독교인으로 자랐지만 청년기에 이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율리아누스는 기독교를 약화시킬 수 있다고 믿을 때 다른 주요 종교, 특히 유대교에 대한 관용과 국가 지원을 제공했다.[41] 율리아누스는 신플라톤주의를 기반으로 중앙 집중식 사제단과 일관된 교리, 의식, 전례를 갖춘 단일화된 이교 전통을 만들고자 했다.[42][43] 그는 기독교가 고전 교육에 접근하고 영향을 받으면서 상당한 이점을 얻었다고 믿고, 기독교 교육자들이 그리스-로마 이교 신앙과 관련된 철학과 문학 작품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다.[41]
율리아누스의 후계자인 요비아누스,[44] 발렌티니아누스 1세, 발렌스는 율리아누스의 종교적 관용 정책을 이어갔고, 이는 이교도 작가들에게 찬사를 받았다.[45] 동로마 제국에서 이교에 대한 공식적인 박해는 서기 381년 테오도시우스 1세 때 시작되었다.[46] 테오도시우스는 반 이교 법을 엄격히 시행하고, 사제단을 해산시키고, 사원을 파괴했으며, 이교 성지에 대한 기독교의 행동에 적극 참여했다.[47] 그는 공공 장소뿐만 아니라 개인 가정에서도 이교 신 숭배를 금지하는 법을 제정했다.[42] 마지막 올림픽 경기는 서기 393년에 열렸으며, 테오도시우스는 더 이상의 게임 개최를 억압했을 가능성이 높다.[13] 서로마 제국의 황제 그라티아누스는 암브로시우스의 영향으로 서 로마 제국에서 존재했던 관용을 종식시켰다. 서기 382년, 그라티아누스는 남아 있는 이교 사제단의 수입과 재산을 몰수하고, 베스타 여신관을 해산시키고, 제단을 제거하고, 사원을 몰수했다.[48]
로마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로마 신들의 숭배는 초기 중세 시대까지 일부 시골 및 외딴 지역에서 지속되었다. 몬테카시노에 아폴로 신전이 있었는데, 숭배자들과 관련된 신성한 숲이 서기 529년까지 남아 있었다. 그곳은 성 누르시아의 베네딕토에 의해 기독교 예배당으로 강제 개조되었고, 그는 제단을 파괴하고 숲을 베어냈다.[49] 마니오트인을 포함한 다른 이교 공동체들은 적어도 9세기까지 그리스의 마니 반도에서 존속했다.[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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